“쓸 게 없어요.” 글을 시작하려는 사람에게서 자주 듣는 말입니다. 떠오르는 일이 전혀 없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기억나는 일은 여럿인데 어느 것을 글로 써야 할지 고르지 못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AI에게 “에세이 소재 추천해줘”라고 물으면 누구에게나 해당할 만한 주제가 늘어납니다. 필요한 것은 새 주제 목록보다 내 경험에서 한 장면을 고르는 기준입니다.
‘내 인생’에서 시작하면 너무 넓습니다
방송 인터뷰를 준비할 때도 “살아오신 이야기를 들려주세요”만으로는 구체적인 장면을 얻기 어렵습니다.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물어야 그 사람만의 말이 나옵니다. 자기 글쓰기도 비슷합니다. ‘이직’, ‘가족’, ‘여행’처럼 큰 주제를 떠올린 뒤 그 안에서 하루, 더 좁게는 한 행동을 찾습니다.
가령 ‘여행이 나를 바꿨다’는 아직 넓은 주제입니다. ‘여행 마지막 날, 끝내 쓰지 못한 엽서를 가방에 다시 넣었다’는 한 장면입니다. 엽서 이야기는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예시이며, 저나 수강생의 실제 경험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글쓴이의 손이 멈춘 순간을 찾는 일입니다.
후보 장면을 세 가지 기준으로 골라봅니다
떠오르는 순간을 세 개 정도 적고, 각각을 아래 기준으로 살펴보세요. 모두 통과해야 글을 쓸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 어떤 장면부터 써볼지 정하는 데 쓰는 질문입니다.
- 행동이 보이나요? 그날 내가 실제로 한 일 하나를 적을 수 있는지 확인합니다. ‘많이 힘들었다’보다 ‘문자를 쓰다 지웠다’가 장면의 시작이 됩니다.
- 더 묻고 싶은 지점이 있나요? 왜 엽서를 쓰지 못했는지, 가방에 다시 넣은 뒤 무엇을 생각했는지처럼 다음 질문이 생기는 장면을 고릅니다. 아직 답을 몰라도 괜찮습니다.
- 지금 공개할 수 있나요? 다른 사람의 사생활이나 아직 내게 버거운 일이 담겼다면 공개 범위를 줄이거나 그 장면은 나중으로 미룹니다. 잘 쓸 수 있는 이야기와 지금 발표할 수 있는 이야기는 다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엽서 장면을 고른다면 ‘엽서를 꺼냈다’와 ‘다시 넣었다’는 행동이 있습니다. 왜 쓰지 않았는지는 더 물어볼 수 있습니다. 받는 사람을 공개하기 어렵다면 이름과 관계를 드러내지 않는 범위에서 쓸지 결정할 수도 있습니다. 선택 기준을 거치면 ‘여행 전체’보다 오늘 쓸 한 순간이 선명해집니다.
후보마다 길게 적을 필요는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 한 줄, ‘내가 한 행동’ 한 줄만 적고 나란히 비교해보세요. 더 큰 사건이라도 내가 본 것과 한 일이 흐릿하면 당장 쓰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반면 사소해 보여도 손에 쥔 물건이나 오간 말이 남아 있는 장면은 첫 문단을 시작하기 좋습니다. 쓰면서 다른 장면이 중심으로 떠오르면 그때 바꿔도 됩니다.
AI에는 글감 추천보다 질문을 부탁합니다
AI는 내가 겪지 않은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경험을 만들어달라고 하기보다, 내가 떠올릴 수 있도록 질문을 하나씩 해달라고 요청하는 편이 낫습니다.
나는 에세이에 쓸 장면을 고르고 싶어. 내 경험을 추측하거나 대신 쓰지 마.
내가 떠올린 주제는 [여기에 직접 입력]이야.
한 번에 질문 하나만 해줘. 시간·장소·물건·내 행동을 먼저 묻고,
내가 답하면 더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후속 질문 하나를 해줘.
답변이 쌓이면 글로 써볼 만한 장면 후보를 내가 한 말 안에서만 정리해줘.
후보마다 내가 실제로 한 행동과 아직 확인되지 않은 해석을 나눠 표시해줘.
AI가 정리한 후보를 바로 글로 완성시키지 않아도 됩니다. 후보 중 한 장면을 고른 뒤 내가 기억하는 말과 행동을 더 적어보세요. 결과에 없는 세부 사항이 새로 들어갔다면 실제 기억인지 확인하고, 기억나지 않는 부분은 억지로 채우지 않습니다.
메모나 사진이 있다면 기억을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다만 사진에 보이는 것과 그날 내가 느꼈다고 지금 해석하는 것은 나누어 적어보세요. 글을 쓰다 보니 그 장면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흘러간다면, 그 사람의 정보도 어디까지 공개할지 다시 판단해야 합니다.
오늘은 큰 주제 하나를 적고, 그 안에서 기억나는 순간 세 개만 찾아보세요. 각 순간에 한 행동, 더 묻고 싶은 것, 공개할 수 있는 범위를 한 줄씩 붙이면 글감 후보가 됩니다. 첫 문장을 잘 쓰는 일은 그다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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