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써보세요.’
누군가에게는 반가운 말입니다. 그러나 쓸 이야기는 많은데 어디서 시작할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빈 화면이 더 크게 보입니다. 퇴사, 이사, 가족, 돌봄 같은 주제는 떠오르는데 첫 문장은 좀처럼 나오지 않습니다. 에세이 쓰기가 막히는 지점은 대개 소재가 없어서가 아니라 시작할 장면을 고르지 못해서입니다.
방송작가는 왜 바로 ‘써보세요’라고 하지 않을까
20년 넘게 시사교양 방송 원고를 쓰면서 저는 출연자마다 질문지를 따로 만들었습니다. 살아온 시간과 지금의 상황이 다른 사람에게 같은 질문으로 시작할 수는 없었습니다. 듣고 싶은 결론이 있어도 첫 질문에 담지 않았습니다. 그날 무엇을 보았고 어떻게 움직였는지부터 들어야 예상하지 못한 말이 나왔습니다.
전자책 『방송작가는 바로 “글 써보세요”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이 방식을 자기 글쓰기로 옮긴 책입니다. 현재 집필 중입니다. 인터뷰 질문이 남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도구라면, 이 글에서 다루는 질문은 내 이야기를 꺼내는 도구입니다. 남에게 묻는 질문을 준비하는 순서는 인터뷰 질문 글에서 따로 다뤘습니다.
‘무엇을 쓸까’보다 ‘어느 순간을 쓸까’
주제가 크면 왜 첫 문장이 늦어질까?
‘이사에 관한 글’을 쓰기로 하면 짐을 싸기 시작한 날부터 새집에 도착한 날까지 모든 일이 한꺼번에 떠오릅니다. 무엇을 먼저 써도 나머지를 빠뜨리는 것 같아 손이 멈춥니다. 범위를 한 순간으로 좁히면 이 부담이 줄어듭니다.
연습용 예시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이사 전날 책상 서랍을 비우다 오래된 열쇠 하나를 발견합니다. 어디 열쇠인지 잠시 생각하다가 버릴 봉투가 아니라 작은 상자에 넣습니다. ‘이사가 내게 남긴 의미’를 설명하지 않아도, 서랍을 열고 열쇠를 찾고 상자에 넣은 행동만으로 한 장면이 섭니다.
첫 장면을 찾는 질문 세 가지
막막할 때는 의미를 묻기 전에 아래 순서로 스스로 물어보세요.
- 그 순간 손에 무엇을 들고 있었나요?
- 바로 다음에 무엇을 했나요?
- 그 자리에서 보거나 들은 것 중 하나만 고른다면 무엇인가요?
감정과 의미를 묻는 질문은 뒤로 미룹니다. 행동과 사물이 먼저 적혀 있으면 감정은 원고를 고치는 동안 따라옵니다.
질문은 결론을 미리 정하지 않게 합니다
‘그 열쇠를 버리고 후련했나요?’라고 물으면 버렸다는 행동과 후련하다는 감정을 이미 정해버립니다. 예시 속 사람은 열쇠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열쇠를 발견하고 어떻게 했나요?’부터 묻습니다. ‘상자에 넣었어요’라는 답이 나오면 ‘왜 그 상자였나요?’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이 답을 짧은 글로 옮기면 이렇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삿짐을 싸다 오래된 열쇠 하나를 찾았다. 어디에 쓰던 열쇠인지 곧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버리는 봉투를 옆에 두고도 열쇠를 작은 상자에 넣었다.
후련함도 미련도 이름 붙이지 않은 문장입니다. ‘이 경험이 나를 성장시켰다’는 결론을 처음부터 정해두지 않아도 됩니다. 그날의 행동과 지금의 해석을 나누어 적어두면, 해석은 고쳐 쓰는 동안 달라져도 괜찮습니다.
답을 모두 옮기면 글이 되지 않습니다
인터뷰를 마쳐도 방송 원고에 모든 답변이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이 글에 필요한 말을 고르고 순서를 바꾸는 편집을 거칩니다. 에세이도 같습니다.
2015년 소월백일장에서 시제를 받았을 때도 저는 떠오르는 단어를 먼저 전부 쏟아냈습니다. 그다음 익숙한 단어를 지우고 신선한 단어만 추려 조합을 고민했습니다. 시 부문 준장원을 받은 그 시는 쏟아낸 단어가 아니라 추려낸 단어로 완성됐습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뺄까?
앞의 열쇠 예시로 질문에 답한 메모가 다섯 줄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 서랍 맨 안쪽에서 열쇠를 찾았다
- 이사 업체가 오전 9시에 온다고 했다
- 열쇠고리에 색이 바랜 끈이 달려 있었다
- 부엌 짐은 아직 손도 못 댔다
- 작은 상자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글에 남길 것은 첫째, 셋째, 다섯째 줄입니다. 열쇠라는 사물과 그것을 대하는 행동이 한 줄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업체 시간과 부엌 짐은 사실이지만 이 장면의 중심을 흐립니다. 빼는 기준은 ‘사실인가’가 아니라 ‘이 장면에 필요한가’입니다.
장면 메모가 쌓이면 한 권의 목차가 됩니다
책이 답할 질문을 한 문장으로 적어두되, 처음부터 목차를 완성하려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먼저 떠오르는 장면을 모아보세요. 장면 메모 하나는 에세이 한 편의 씨앗이고, 연결되는 메모 여러 개는 전자책 한 챕터의 재료가 됩니다. 무엇이 서로 이어지는지 살펴보며 목차의 순서를 잡고 고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삶 전체를 설명하기보다 한 순간만 골라보세요. 그때 본 것 하나와 한 행동 하나를 메모하면 됩니다. 첫 문장은 그 메모를 보고 나중에 골라도 늦지 않습니다.
당신의 책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한 권의 책은 장면 메모 하나에서 시작합니다. 오늘 떠오른 순간이 있다면 어떤 물건, 어떤 행동이었는지 댓글로 남겨주세요.
함께 읽으면 좋은 글
WeRoute와 함께, 질문으로 완성하는 글쓰기
“질문에 답하면, 한 편의 글이 됩니다.” 더 구체적인 글쓰기 방법과 예시 템플릿이 필요하시다면 WeRoute 글쓰기 안내를 확인해보세요.
helloweroute@gmail.com | 카카오톡: werou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