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장은 그 자리에서 시제를 받고, 정해진 시간 안에 써서 제출해야 합니다. 미리 써온 글을 다듬을 수 없다는 점에서 다른 공모전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2015년 소월백일장에서 준장원을 받았을 때의 기억을 바탕으로 정리합니다. 다만 밝혀둘 게 있습니다. 벌써 여러 해가 지난 일이라 분 단위 시간 배분까지는 가물가물합니다. 대신 시제를 받고 무엇부터 했는지, 어떤 순서로 생각을 옮겼는지는 지금도 선명합니다. 이 글은 그 흐름을 따라갑니다.
초반 — 시제를 받으면 단어부터 쏟아냅니다
시제를 받자마자 글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그 시제를 보고 떠오르는 단어를 손에 잡히는 대로 다 적었습니다. 잘 쓰려는 생각 없이 그냥 쏟아내는 단계였습니다. 그렇게 적어놓고 보면 절반 이상은 뻔한 단어였습니다.
이 방식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글쓰기 교육에서는 ‘프리라이팅(freewriting)’이라고 부릅니다. 미국의 작문 교육자 피터 엘보가 1973년 저서 『Writing Without Teachers』에서 정리한 방법으로, 정해진 시간 동안 맞춤법이나 문장력은 신경 쓰지 않고 손을 멈추지 않는 것이 핵심입니다. 백일장처럼 시간이 정해진 자리에서 이 방식이 유독 잘 맞습니다. 잘 쓰려는 생각이 오히려 첫 줄을 막기 때문입니다.
왜 뻔한 단어부터 지웠을까
써놓은 단어 중에서 식상하지 않고 신선한 것만 다시 골랐습니다. 누구나 그 시제를 보고 바로 떠올릴 법한 단어는 지웠습니다. 백일장은 같은 시제로 여러 사람이 동시에 씁니다. 다들 비슷한 곳에서 출발한다면, 결국 남들이 잘 안 쓸 단어를 쥐고 있는 쪽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심사하는 사람은 하루에 수백 편을 읽습니다. 익숙한 단어로 시작하는 원고는 그 자리에서 다음 원고로 넘어가게 됩니다. 낯선 단어 하나가 그 원고를 한 번 더 읽게 만드는 이유가 됩니다. 추리는 기준은 간단합니다. 옆자리 사람도 똑같이 떠올렸을 것 같으면 지우고, 나만 떠올렸을 것 같으면 남깁니다.
중반 — 남은 단어를 조합하며 다른 시점을 찾습니다
신선한 단어만 남기고 나면, 그다음은 그 단어들을 어떻게 엮을지 고민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단어 하나하나보다 단어들 사이의 관계를 더 오래 들여다봤던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시점도 자연스럽게 조금 다르게 잡고 들어갔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늘 뻔한 글보다는 다른 색을 입히려고 애썼습니다. 정공법으로 곧장 쓰기보다, 남들이 잘 안 볼 각도부터 찾아두는 편이 저한테는 더 맞았습니다.
예를 들어 남긴 단어가 다섯 개라면, 그중 어느 것을 시의 첫 행에 놓고 어느 것을 마지막에 남길지부터 정합니다. 먼저 놓은 단어가 다음 단어를 끌고 오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두 단어가 서로 밀어내서 다시 조합을 짜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시행착오에 시간을 가장 많이 씁니다. 문장으로 옮기는 일 자체는 오히려 빠릅니다. 조합이 정해지면 손이 알아서 움직입니다.
오래된 기억이라 이 과정에 정확히 몇 분을 썼는지까지는 가물가물합니다. 다만 흐름은 분명합니다. 초반은 단어를 쏟아내는 시간, 중반은 그 단어를 추리고 조합을 고민하는 시간, 그리고 남은 시간에 문장으로 옮겨 마무리했습니다. 시간을 분 단위로 재기보다, 이 세 흐름 중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 더 도움이 됐습니다.
제 기준으로 나눈다면
분 단위로 정확히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뭘 했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지금 누군가 백일장을 앞두고 있다면 이렇게 나누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앞쪽 구간은 온전히 단어를 위해 씁니다. 시제를 보고 떠오르는 대로 다 적고, 그중 식상한 것을 지우는 데까지입니다. 잘 쓰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구간의 목표는 좋은 문장이 아니라 좋은 재료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가운데 구간은 조합과 시점입니다. 남은 단어들을 어떻게 엮을지, 어떤 위치에서 이야기를 시작할지를 정합니다. 여기서 남들과 다른 각도를 찾아두면, 실제로 쓰는 구간에서 흔들릴 일이 확 줄어듭니다.
마지막 구간에야 비로소 씁니다. 앞의 두 구간을 충분히 거쳤다면, 쓰는 시간 자체는 오히려 짧게 느껴집니다.
전문가들은 시간을 어떻게 나눌까
제 방식이 정답은 아닙니다. 좀 더 정량적인 기준도 있습니다. 수필가 강현순 씨는 한 인터뷰에서 백일장 시간 배분을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시간이 1시간 주어지면, 20분간은 ‘생각잡기’를 통해 글의 맥을 구상하고, 30분 동안은 잡념 없이 글을 계속 써 내려갑니다. 그리고 남은 10분간 글다듬기를 하세요.”
— 경남신문 「백일장의 계절… 도내 심사위원들이 말하는 ‘글쓰기 비법’」 (2026-09-09 확인)
이 비율(구상 2 : 집필 3 : 퇴고 1)을 세 시간짜리 백일장에 그대로 옮기면 구상 60분, 집필 90분, 퇴고 30분 정도가 됩니다. 시제 난이도에 따라 조정은 필요하지만, 손이 먼저 나가기 전에 구상에 확실히 시간을 쓰라는 방향은 제 기억 속 순서와도 겹칩니다. 국어 교사 김지수 씨도 한 교육 매체 인터뷰에서 “내용 조직하기”를 강조하며, 시간이 한정된 대회일수록 쓰기 전에 짜임새부터 잡아두는 쪽이 효율적이라고 조언합니다.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저는 단어를 먼저 쏟아내고 추리는 쪽이었고, 어떤 사람은 곧바로 개요부터 짭니다. 다만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손이 먼저 나가지 않게, 쓰기 전에 확보하는 시간이 결과를 가른다는 것입니다.
마무리 — 시상식 없이 끝난 백일장
준장원 발표는 그날 현장에서 나오지 않고 나중에 따로 알게 됐습니다. 시상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현장에서 세 시간을 채워 글을 써낸 순간과, 결과를 전해 들은 순간이 따로 떨어져 있었던 셈입니다. 상을 받는 장면도, 이름이 불리는 순간도 제 기억 속엔 없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남은 건 상장보다 그 세 시간 동안 단어를 고르고 조합했던 과정 쪽입니다. 결과를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과정만 또렷하게 남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백일장은 결국 그 자리에서 무엇을 어떻게 골라내느냐의 싸움이라는 걸, 시상식에 가지 못하고 나서야 더 분명히 알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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