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한 출판사가 2025년 한 해 동안 생성형 AI로 약 9,000권을 펴냈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딸깍 출판”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AI 오류와 저작권 문제로 독자 신뢰가 떨어졌다는 비판과 “AI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는 반박이 동시에 나왔습니다. (경향신문, 2026.2.2)
이 기사를 보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화가 나거나 놀라운 감정이 아니라, 의심이었습니다.
정보책은 그렇다 쳐도
경제, 고전 해설, 자기계발처럼 정보를 정리하는 책이라면 AI가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을 모으고 구조를 잡는 일은 원래도 사람보다 AI가 빠릅니다.
그런데 소설이나 에세이, 시도 그렇게 될까요
의심이 든 건 이 지점이었습니다. 정보가 아니라 사유를 담는 글, 그러니까 소설이나 수필, 시 같은 것도 이렇게 대량으로 나올 수 있을까요. 사람의 철학을 학습해서 나온 문장에, 그 사람만 가진 깊이가 있을까요.
정보는 맞고 틀림이 있습니다. 틀리면 고치면 됩니다. 그런데 사유는 다릅니다. 깊이가 있는지 없는지는 눈에 보이지 않고, 읽는 사람이 시간을 들여야 알 수 있습니다. 9,000권이라는 숫자 앞에서 제가 걸린 건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틀린 연도나 잘못된 인용은 원문을 대조하면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에 깊이가 있는가”는 대조할 원문이 없습니다. 학습한 철학을 그럴듯하게 재조합한 문장과, 그 철학을 실제로 통과한 사람이 쓴 문장은 겉보기엔 비슷할 수 있어도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작가들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저 혼자만의 의심은 아니었습니다. 신춘문예, 창비 신인문학상, 한국과학문학상, 교보문고 스토리대상 같은 곳들이 최근 AI 사용을 제한하는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문단 안에서도 이 규제를 보는 시선은 엇갈립니다. (경향신문, 2025.12.30)
같은 기사에서 차미령 평론가는 “지금 글 쓰는 사람 누가 AI를 안 쓴다고 할 수 있나… 모두를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방식”이라며 규제 자체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장강명 소설가도 AI 사용 여부를 실제로 가려낼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점을 짚었습니다.
해외에서는 이미 한 차례 겪은 일이기도 합니다. 같은 기사에 따르면 미국 SF 전문지 클락스월드는 2023년 2월, AI로 만든 투고작이 급증하자 아예 신규 투고 접수를 중단한 적이 있습니다.
규제로 가려낼 수 있느냐와, 좋은 글이 될 수 있느냐는 사실 다른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후자 쪽이 더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 느립니다
저는 방송작가로 20년 넘게 글을 써왔습니다. 그 시간 동안 배운 건 하나입니다. 글쓰기에서 중요한 건 빨리 쓰는 게 아니라, 자기만의 색깔을 찾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방송 대본도 그랬습니다. 초고와 최종고는 거의 다른 글이 되곤 했습니다. 그 차이를 만드는 건 속도가 아니라, 몇 번을 다시 읽고 고쳐 쓰는 시간이었습니다. 색깔은 그 시간 속에서 조금씩 드러났습니다.
색깔은 한 번에 나오지 않습니다. 다양한 글을 써보고, 고쳐 쓰는 과정을 거쳐야 조금씩 드러납니다. 평생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과정을 건너뛸 수 없습니다. 그 과정이 있어야, 쓰고 싶은 마음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AI로 얼마나 빨리 낼 수 있는가”는 애초에 중요한 질문이 아닙니다. 중요한 질문은 “이 글에 내 색깔이 있는가”입니다.
AI를 쓰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정보를 모으고 구조를 잡을 때, 저도 AI를 씁니다. 다만 그 다음 단계, 글에 제 경험과 판단을 넣는 과정만큼은 넘기지 않습니다. 넘기는 순간, 그 글은 빨라지는 대신 저만의 색깔을 잃습니다.
이번 논란에서 비판받은 지점 중 하나도 저작권과 신뢰였습니다. 어떤 이름을 걸고 낸 글인지, 그 이름이 실제로 그 문장에 책임을 질 수 있는지의 문제입니다. 저는 제 이름(정확히는 필명)을 걸고 글을 냅니다. 그러니 그 글에 제 판단이 들어가지 않은 문장을 넣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는 말은 맞지 않을까요
이 부분은 저도 인정합니다. AI로 정보를 정리하고 초안을 잡는 흐름 자체는 이제 되돌릴 수 없습니다. 자료 조사에 걸리던 며칠이 몇 시간으로 줄어든 건 분명한 이득입니다.
다만 흐름을 따라가는 것과, 그 흐름에 색깔까지 맡기는 것은 다른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속도는 AI를 따라갈 수 있어도, 색깔은 각자 시간을 들여야 나옵니다. 저는 전자는 받아들이고, 후자는 여전히 제가 하기로 정했을 뿐입니다.
9,000권이라는 숫자가 나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중 몇 권이 시간이 지나도 다시 읽히는 책으로 남을지는, 지금으로선 아무도 모릅니다.
이 글을 읽는 분은 지금 어떤 글을 쓰고 계신가요. 빠르게 완성하는 쪽과 천천히 색깔을 찾아가는 쪽, 어느 쪽을 선택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어느 쪽을 선택했는지는, 그 글을 쓴 사람이 가장 먼저 알게 됩니다.
🚀 실전 AI 프롬프트 가이드
내 글에 색깔이 있는지 스스로 점검하는 프롬프트입니다.
아래 글을 읽고 확인해줘.
[글 붙여넣기]
확인할 것:
1. 이 글에서 나만 쓸 수 있는 표현이나 경험이 어디에 있는지 짚어줘
2. 어디를 지워도 다른 사람 글처럼 보이는지 표시해줘
3. 문장 리듬이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곳이 있으면 알려줘
4. 이 글이 "정보 전달"인지 "내 생각"인지 구분해서 표시해줘
점수를 매기지 말고, 어느 문장이 왜 그런지만 짚어줘.
점수가 아니라 “어디가 왜 그런지”를 물어보는 게 핵심입니다. 점수는 위로가 되지만, 위치는 실제로 고칠 수 있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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